염농산 독립운동가, 육영사업가
기생 앵무로 알려진 염농산(1860-1947)은 한때
경상감영 교방의 관기였으나 뒷날 달성권번을 결성하여
초대회장이 된다. 평소 “기생은 돈 많은 사람만 섬겨서
안 된다.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칠 수도 있어야
한다”고 강조했다.
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네 번째로 거금
100원을 기부하였으며, 이에 그치지 않고 “누구든지
1천원을 출연하면 죽기를 무릅쓰고 따라한다.”고 해 이에 감동한
서상돈, 김병순, 정재학 등이 각기 만원씩 출연하기로 결의했다 .
성주 출신 염농산은 성주에 해마다 물난리가 나자, 마을에
방천을 쌓았다. 이 공덕을 기려 주민들이 세운 ‘염농산 제언
공덕비’가 성주군 용암면에 지금도 세워져 있다. 78세 때는
대구교남학교(현 대륜중고)가 경영난으로 폐교에 이르자
거금 2만원에 달하는 택지 및 건물을 기부한다. 이는 자신이
가진 재산의 태반에 이르는 큰돈이었다.
염농산은 기생으로
살았으나 바람 앞 등불 같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
평생을 베풀다 떠난 사회의 큰 스승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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